[뒤늦은 진심] 이제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
그 말이 지새벽의 이성을 끊어놓았다. ‘나는 오빠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 한 문장은 지난 10년의 모든 순간을 요약하는 잔인한 결론이었다. 그의 장난에 웃고, 그의 무심함에 울고, 그의 곁에 머물기 위해 스스로를 지워나갔을 그녀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는 이제야 알았다. 지새벽은 대답 대신 실소했다.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웃음소리는 없었다. 그저 가슴팍이 잘게 들썩이며, 터져 나오는 숨이 비웃음처럼 새어 나왔다. 미친놈. 권유연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10년 동안 바로 곁에 있던 이 아이의 마음 하나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끔찍하게도 우스웠다.
지새벽|아무것도 아니라고?
천천히,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 권유연을 똑바로 담았다. 방금 전의 분노와는 다른, 차갑고 서늘한 무언가가 그의 눈에 서려 있었다. 그는 붙잡고 있던 어깨 한쪽을 놓고, 그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지새벽|그래, 맞아.
그가 순순히 인정했다. 권유연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런 뜻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새벽의 다음 말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새벽|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었어야 했어.
그가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려,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처음으로 닿는 부드러운 살결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지새벽|그냥 어릴 때부터 알던 동생. 가끔 보면 귀찮게 구는 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웃고, 가끔 반찬이나 해다 주는 애. 딱 그 정도였어야지. 너는 나한테.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손가락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천천히 더듬었다.
지새벽|근데 아니잖아, 지금.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모든 상황이, 엉망으로 얽혀버린 관계가, 그리고 이제야 선명해진 제 감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지새벽|네가 그딴 소리 하는 거, 하나도 안 괜찮아. 네가 우는 거 보기 싫고, 네가 나 때문에 10년 동안 썩었다는 거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다고. 이게… 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드는 감정이냐?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외면하지 못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자신의 눈에 가두고 그는 속삭이듯,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지새벽|대답해 봐, 권유연.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거냐고.
그녀의 손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생수병을 쥐고 있던 그의 손 위로, 떨리는 온기가 와 닿았다. 신경 쓰지 말라면서, 내버려 두라면서, 정작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 모순된 행동과 애원 섞인 목소리에 지새벽은 숨을 멈췄다. 지금이 아니면, 나는 또 오빠가 보고 싶어질 거야. 그 말이 귓가에 박혔다.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절규가, 실은 얼마나 그를 원하는지에 대한 처절한 고백인지를 깨달았다. 바보같이.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그를 갈망하고 있었다.
지새벽은 들고 있던 생수병을 아무렇게나 현관 바닥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 병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오히려 권유연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그녀가 붙잡은 손목을 빼내지 않았다. 대신, 남은 한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무너져 내리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이.
지새벽|…그럼 보고 싶어 해.
울음 섞인 정적을 깨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뚝뚝하고, 거칠고, 그래서 더없이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지새벽|또 보고 싶어지면, 그냥 봐. 그만두지 마.
그가 팔을 잡아당겼다. 완력으로 그녀를 일으키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바닥에 주저앉아 있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혼란스럽게 흔들리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는 울고 있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새벽|네가 나 때문에 힘든 거, 이제 알았으니까.
그가 말을 멈추고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들릴지 알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위로하는 법도, 상처를 보듬는 법도 몰랐다. 그저 제멋대로 모든 것을 끝내려는 그녀를 붙잡는 것 말고는.
지새벽|…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그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거의 기어들어갈 듯 작아졌다. 10년 동안 그녀가 했을지도 모를 말. 이제 와서야 그가 그녀에게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고개를 숙여 이마를 제 무릎에 기댔다. 완전히 지친 사람처럼, 그리고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처럼.
지새벽|네 마음대로 좋아했으니까, 이제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