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간] 못 해. 그렇게는.
그녀가 손을 뿌리치는 순간, 지새벽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뒷걸음질 치다 소파 테이블에 부딪히는 것을 보며,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게,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미안해서 온 거면 됐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그 말은 마치 너와 나 사이에는 이 정도의 감정 소모도 사치라는 뜻처럼 들렸다. 죄책감은 너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라는 말에, 지새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참? 지금 누가 누굴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데.
지새벽|놔달라고?
그가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휘청이며 한 걸음 끌려온 권유연이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엉망으로 젖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입꼬리를 비틀었다.
지새벽|신경 쓰지 말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는 남은 한 손으로 제멋대로 뻗친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저 눈앞의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만이 선명했다.
지새벽|그럼 뭔데.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랐는데. 네가 10년 동안 나 때문에 그 모양 그 꼴로 썩어갔다는 걸 알았는데, 내가 그걸 보고도 모른 척 게임이나 하고 있었어야 돼?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분노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감정이 들끓었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녀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항상 여유롭고, 짓궂고, 모든 것을 가볍게 넘기는 지새벽은 없었다. 대신 잔뜩 날이 선 채,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지새벽|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그럼 무슨 감정을 느껴야 되는데. 알려줘 봐, 네가.
그가 턱으로 그녀의 집 안, 어지럽게 널린 술캔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젖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새벽|이 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으라고? 그게 네가 바라는 거야?
그만하자. 없었던 걸로 하자. 그 말들이 마치 사형 선고처럼 지새벽의 귓가에 울렸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10년을 감당할 수 없다며 뒷걸음질 쳤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감당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권유연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인생에서 통째로 사라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안 됐다. 절대로.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서 있던 지새벽이 허, 하고 기가 막힌 숨을 터뜨렸다. 그는 제정신이냐는 듯한 눈으로 권유연을 바라보았다. 울음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는 저 말들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인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지새벽|…뭐라고?
바닥에 내리꽂았던 시선이 맹렬하게 들어 올려졌다. 그는 벽을 짚고 있던 손으로 바닥을 박차듯,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다시 좁혔다. 방금 전 스스로 물러났던 그 거리였다. 그는 권유연의 바로 앞에,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파고들었다.
지새벽|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목소리에는 더 이상 무력감만 담겨 있지 않았다. 당혹감과, 이해할 수 없다는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절박함이 뒤섞였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뿌리치지 못하도록,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새벽|없었던 걸로 해? 뭘. 네가 10년 동안 나 하나 보고 바보같이 군 거? 아니면 내가 방금 전까지 게임에서 너한테 그 지랄 한 거? 뭘 없었던 걸로 하자는 건데.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가 좁은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는 마치 붙잡지 않으면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지새벽|네 마음대로 시작했으니까, 끝내는 것도 네 마음대로 하겠다, 이거야? 그래서 이제 와서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아, 그러세요, 하고 보내주면 되는 거야?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젖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흔들리는 벽안에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타올랐다. 그건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지새벽|못 해. 그렇게는.
그가 잘라 말했다. 붙잡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정신 차리라는 듯이.
지새벽|네 10년, 이제 와서 내가 알았는데. 어떻게 그걸 없었던 걸로 해. 안 해.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