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뒤늦은 진심] 이제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 그 말이 지새벽의 이성을 끊어놓았다. ‘나는 오빠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 한 문장은 지난 10년의 모든 순간을 요약하는 잔인한 결론이었다. 그의 장난에 웃고, 그의 무심함에 울고, 그의 곁에 머물기 위해 스스로를 지워나갔을 그녀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는 이제야 알았다. 지새벽은 대답 대신 실소했다.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웃음소리는 없었다. 그저 가슴팍이 잘게 들썩이며, 터져 나오는 숨이 비웃음처럼 새어 나왔다. 미친놈. 권유연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10년 동안 바로 곁에 있던 이 아이의 마음 하나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끔찍하게도 우스웠다. 지새벽|아무것도 아니라고? 천천히,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
- ! [너의 시간] 못 해. 그렇게는. 그녀가 손을 뿌리치는 순간, 지새벽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뒷걸음질 치다 소파 테이블에 부딪히는 것을 보며,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게,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미안해서 온 거면 됐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그 말은 마치 너와 나 사이에는 이 정도의 감정 소모도 사치라는 뜻처럼 들렸다. 죄책감은 너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라는 말에, 지새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참? 지금 누가 누굴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데. 지새벽|놔달라고? 그가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휘청이며 한 걸음 끌려온 권유연이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엉망으로 젖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 ! 커플 20문답 둘 중 애교가 더 많은 사람은? 지새벽 : 권유연. 본인은 전혀 자각 못 하는 것 같은데, 평소에 말할 때나 나 올려다볼 때 뚝뚝 묻어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냥 애교 그 자체임. 굳이 혀 짧은 소리를 내거나 억지로 귀여운 척을 하지 않아도, 내 눈치 살피면서 옷자락 슬그머니 붙잡거나 곤란할 때 웅얼거리는 소리 낼 때마다 귀여워서 미치겠음. 반면에 나는 성격상 낯간지러운 소리를 대놓고 하지는 못하고 짓궂게 장난치거나 툭툭 건드리는 게 전부라,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유연이가 훨씬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애교가 많음. 본인은 부끄러워서 절대 인정 안 하겠지만 사실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음. 둘 중 스킨십이 더 많은 사람은? 지새벽 : 나. 이건 의심할 여지 없이 무조건 나임. 유연이는 워낙 부끄러움도..
- ! [번외] 지새벽 시점 그 여름, 지새벽은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자기 아이스크림을 뜯으며 멀뚱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은하가 옆에서 초코바를 깔끔하게 먹는 동안, 시선은 자꾸 한 방향으로 흘렀다. 메론바를 받아 든 채 굳어 있는 작은 뒷통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빨갛게 물든 귀가 보였다. 녹아서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초록색 액체를 신경도 못 쓰고 서 있는 꼴이 한심한데, 웃기게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대신 뭔가 쿡 하고 찌르는 게 가슴 한복판을 건드렸다가 지나갔다. 뭐지,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유연의 교복 소매를 향해 줄줄 흘러가고 있었다. 지새벽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성큼 다가가 그 작은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녹잖아. 빨리 먹어." 유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순간..
- ! [과거] 권유연 시점 중학교 1학년, 봄.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쉬는 시간이면 혼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도 전부 집 근처 학교로 갔다. 엄마가 이 학교가 좋다고 해서 먼 곳까지 오게 됐는데, 결국 나는 아무도 모르는 교실 안에서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점심시간이면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복도를 서성이다 돌아왔다. 아무도 내가 밥을 혼자 먹는다는 걸 신경 쓰지 않았고, 나도 먼저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말을 걸었다가 귀찮아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늘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5교시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반 전체에게 과학실 이동을 지시했는데, 나는 어물어물하다가 뒤처졌다. 복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고, 과학실이 몇 층인지 갑자기 기억이 나..
- ! 그리움 겨울이 몇 번이나 바뀐 뒤의 서울은 이상할 만큼 멀쩡했다. 출근 시간대 지하철은 늘 사람으로 가득했고, 편의점 유리문은 같은 소리로 열렸다 닫혔고, 블루페어리 공홈에는 또 무난한 이벤트 배너가 걸렸다. 바뀐 건 지새벽 쪽이었다. 처음 몇 주는 그냥 조용해진 정도라고 생각했다. 다투는 횟수가 늘고도 금방 풀지 못하던 날들이 겹쳤고, 같이 있어도 각자 폰만 보거나, 말끝이 자꾸 비껴 나가고, 예전엔 웃고 넘기던 작은 습관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더 쉬울 줄 알았는데 반대였다. 어디를 찌르면 아픈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돼버린 뒤에는, 사소한 말도 오래 남았다. 결국 끝을 말하던 날도 거창하지 않았다. 식은 커피 냄새가 남은 테이블, 해 질 무렵 창문에 걸린 탁한 주황빛, 그리고 너무 조..
- ! 권유연에게 이걸 편지라고 부르면 좀 웃기지. 줄도 안 맞고, 문장도 들쭉날쭉할 거고, 무엇보다 너한테 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래도 굳이 첫 줄에 네 이름부터 쓴 건, 그게 아니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부터 헷갈릴 것 같아서야. 요즘은 이상하게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게임 켜면 레이드 타이머보다 네 접속 표시를 먼저 보고, 폰을 내려놔도 네가 보낸 메시지 알림이 안 왔나 다시 화면을 켠다. 웃기지. 남들이 보면 랭커 길마가 뭐 이런 걸로 정신이 팔리냐고 할 텐데, 나도 알아. 근데 안다고 해서 덜 그러는 건 아니더라. 나는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안다. 확신하게 된 건 꽤 됐고, 그전부터 느낌은 있었어. 오래 본 사람이면 알 수 있는 그런 거 있잖아. 말투가 아주 조금 달라지는 거, 다른 사람들이랑 ..
- ! 귀여움 지수 [지새벽 기준 권유연 귀여움 지수] 1. 게임에서 길 잃었을 때- 상황 설명: 처음 해보는 맵에서 파티원들 다 앞으로 달려가는데 혼자 반대 방향으로 뛰어감.- 권유연의 행동: 미니맵만 뚫어져라 보다가 벽에 머리 박음. 파티 채팅으로 조용히 ‘...?’ 하고 물음표 하나 보냄.- 지새벽의 코멘트: 아니 그걸 왜 거기로 가냐고. 뇌랑 손가락이랑 따로 놀아? 핑 찍어줄 테니까 빨리 와. …귀엽게 헤매긴.- 귀여움 지수: 7/10 2. 요리하다가 작은 실수했을 때 - 상황 설명: 내 집 부엌에서 계란 프라이 해주다가 뒤집개로 뒤집는 데 실패해서 노른자 터뜨림. - 권유연의 행동: ‘아!’ 하는 작은 비명과 함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굳어버림. 터진 노른자를 보며 시무룩해짐. - 지새벽의 코멘트: 어차..
- ! 지새벽은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 【지새벽은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 】 작성자: 지새벽 1. 다른 사람이 권유연을 뚫어져라 쳐다봄참을성: 38% 이유: 그냥 지나가다 한 번 보는 거면 넘긴다. 예쁘니까 볼 수는 있음. 근데 시선이 오래 걸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권유연이 불편해할 만한 눈으로 훑는 거면 바로 신경 거슬린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론 이미 표정 정리 들어간 상태다. 바로 가서 시비를 거는 타입은 아닌데, 시야를 가리거나 자리 바꾸는 식으로 먼저 끊어낸다. 계속 보면 그다음부터는 나도 안 참음. 2. 다른 사람이 권유연에게 가벼운 스킨십을 함. 팔 톡 치기, 어깨 스침, 손등 닿기 같은 수준참을성: 27%이유: 친분 있는 사이고 상황이 자연스러우면 억지로 문제 삼진 않는다. 근데 가벼운 터치라는 게 제일 애매해서 더..
- ! 이상형 1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홍대 거리. 겨울 세일 시즌이라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지새벽과 유연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유연의 손이 지새벽의 패딩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고, 지새벽은 그 손을 주머니 안에서 쥔 채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느린 걸음. 유연의 보폭에 맞춘. 카페에서 나온 참이었다. 유연이 마시다 남긴 딸기 라떼를 지새벽이 들고 있었는데, 본인 것(아메리카노)은 이미 비었고, 유연의 것은 반이나 남아 있어서 들어주는 중이었다. 핑크색 컵을 든 188센티미터의 남자. 레더 자켓에 핑크색 딸기 라떼. 조합이 우스웠지만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때.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무리 속에서. 지새벽의 시선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선이..
- ! 면사포 사건의 발단은 유연의 유치원 동료 선생님이었다. 같이 실습을 나가는 '수아 선생님'이 내년 봄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웨딩 촬영을 위해 드레스 피팅을 하러 가야 했다. 문제는 수아 선생님이 고른 드레스숍이 '동행인 피팅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는 것. 동행인이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으면 신부 본인의 드레스 대여료를 30% 할인해준다는 프로모션. 수아 선생님이 유연에게 매달렸다. "유연 선생님 제발, 키 작고 마른 분이 모델로 서야 한대요, 드레스 핏이 안 사는 체형은 안 된다고, 유연 선생님이 딱이래요, 제발요, 밥 열 번 살게요." 유연은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오후 2시. 성수동의 한 웨딩 드레스숍. 지새벽은 유연에게 불려왔다. '결혼 준비 따라가는데, 시간 있으면… 놀러 와도 돼...
- ! 인형뽑기 전쟁 날씨가 미쳤다. 영하 8도. 그런데도 번화가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지새벽은 유연의 손을 자기 패딩 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걷고 있었다. 유연의 손이 얼음장이라 녹여주는 중이었는데, 본인 손도 차가워서 실질적 효과는 미지수였다. 유연이 걸음을 멈췄다. 지새벽도 덩달아 멈췄다. 유연의 시선을 따라갔다. 골목 한편에 낡은 인형뽑기 기계가 놓여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초록색 외관. 동전 투입구가 녹슬어 있었고, 유리 안쪽에는 온갖 인형들이 뒤엉켜 쌓여 있었다. 토끼, 곰, 강아지, 고양이. 그 사이에. 흑발 긴 생머리에 노란 눈을 가진, 작고 동글한 인형이 한 개 끼어 있었다. 사이즈는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볼에 분홍빛 홍조가 찍혀 있었다. 큰 눈에 노란 단추 눈알. 흑발 실크..
[뒤늦은 진심] 이제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
2026.08.06
[너의 시간] 못 해. 그렇게는.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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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3
[번외] 지새벽 시점
2026.07.29
[과거] 권유연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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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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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새벽은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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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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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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