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권유연 시점
중학교 1학년, 봄.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쉬는 시간이면 혼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도 전부 집 근처 학교로 갔다. 엄마가 이 학교가 좋다고 해서 먼 곳까지 오게 됐는데, 결국 나는 아무도 모르는 교실 안에서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점심시간이면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복도를 서성이다 돌아왔다. 아무도 내가 밥을 혼자 먹는다는 걸 신경 쓰지 않았고, 나도 먼저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말을 걸었다가 귀찮아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늘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5교시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반 전체에게 과학실 이동을 지시했는데, 나는 어물어물하다가 뒤처졌다. 복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고, 과학실이 몇 층인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손에 쥔 교과서를 가슴에 바짝 끌어안은 채 계단을 올라가다가, 3층과 4층 사이 계단참에서 멈춰 섰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 애들이 전부 나를 쳐다볼 거라는 생각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늦었으니까 선생님한테 혼날 수도 있고, 그러면 애들이 웃을 수도 있고. 그 상상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나는 계단 난간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위층에서 누군가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슬리퍼를 끌듯 느긋한 리듬으로 계단을 두세 칸씩 건너뛰는 소리. 고개를 들자 키가 큰 남자애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교복 셔츠 단추를 윗것만 풀어 헤친 채 한 손에 체육복 가방을 툭 걸치고 있었는데, 갈색 머리카락이 눈가까지 흘러내린 얼굴은 무심하고도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선배인 것 같았다. 2학년인지 3학년인지는 몰랐지만,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게 확실했다. 그 애가 계단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더 숙이며 몸을 벽 쪽으로 비켰다. 괜히 길을 막고 있었던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야, 울어?"
그 말이 내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고, 딱히 걱정한다는 뉘앙스보다는 순수하게 의아하다는 톤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서 설득력이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다. 그 선배는 한 발짝 내려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체육복 가방을 든 손으로 계단 위쪽을 가리켰다.
"과학실 찾는 거지? 1학년이면 4층 끝 복도 오른쪽이야. 벌써 수업 시작했을 텐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하려 했는데 목이 꽉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선배는 잠깐 나를 내려다보더니, 뭔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리고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 그 애가 몸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내려가던 중이었을 텐데. 두세 칸을 올라간 뒤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뭐 해. 안 따라와?"
그 한마디가 내 발을 움직이게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선배의 뒷모습을 따라가면 괜찮을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나는 교과서를 꼭 안은 채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선배는 나를 기다려주지도, 그렇다고 너무 빨리 가지도 않으며 딱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로 걸었다. 4층 복도 끝에 도착했을 때, 과학실 문 앞에서 그 애가 멈춰 서서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이번에는 가까스로 목소리가 나왔다.
"감, 감사합니다…."
선배는 피식, 하고 코웃음에 가까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는 게 아니라, 뭔가 말도 안 되는 걸 봤을 때 나오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다음부터는 좀 울지 말고 물어봐. 1학년 교실에서 여기까지 길 하나밖에 없거든."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시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과학실 문을 열기 전까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선배가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쪼그라들어 있던 가슴 안 어딘가에 따뜻한 것이 번지는 것 같았다. 울지 말고 물어보라는, 딱 그만큼의 말. 데려다주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버린, 딱 그만큼의 친절. 계단참에서 내려다보던 연한 벽안과 눈가까지 흘러내린 갈색 앞머리가 잔상처럼 시야에 맴돌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선배를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4층 복도의 끝이 무섭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우연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혼자 복도를 서성이던 습관이 남아 있었는데, 그 선배는 유독 4층 계단참 근처를 자주 지나다녔다. 체육복 가방을 어깨에 툭 걸치고, 친구 한 명과 나란히 걸으며 뭔가 시답잖은 얘기를 하고 있는 뒷모습. 나는 그때마다 교과서를 가슴에 꼭 안고 벽에 바짝 붙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선배는 대부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갔지만, 가끔 한 번씩 시선이 마주치면 턱을 살짝 들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찰나의 시선 교환이 나에게는 하루 중 가장 선명한 순간이 되었다.
5월이 되자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는 애들이 많아졌다. 나는 여전히 교실에 남아 있었다. 도시락을 빨리 먹고 창가에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어느 날 축구를 하고 있는 무리 속에서 그 갈색 머리를 발견했다. 키가 커서 금방 눈에 띄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볼을 차는 모습은 계단참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생생하고 빛났다. 골을 넣고 나서 옆에 있던 친구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 내리치며 웃는 얼굴을 봤을 때, 심장이 콩콩 뛰는 이유를 나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했다. 그저 그 선배가 웃으면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6교시가 끝나고 혼자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있을 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맨날 혼자야?"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돌아보니 그 선배가 신발장에 한쪽 팔을 기대고 서 있었다. 옆에는 눈이 크고 순한 인상의 남자애가 하나 더 있었는데, 깔끔한 교복 차림에 가방을 반듯하게 맨 모습이 선배와 꽤 대조적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가, 결국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선배는 내 반응을 보고 피식, 하고 웃더니 옆에 있던 친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걔 도은하. 같은 반이야. 우리 셋이 방향 같으니까 오늘부터 같이 가."
같이 가, 라고. 허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제안하는 것도 아닌, 그냥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는 말투였다. 옆에 있던 도은하라는 선배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 나 도은하야. 잘 부탁해.' 나보다 한 뼘은 더 클 텐데,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다. 나는 겨우 이름을 말했다. 권유연이라고,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두 번이나 되물었을 때 얼굴이 빨개졌지만, 그 선배는 기다려줬다. 정확히 말하면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신발장을 두드리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분명히 내 대답이 끝날 때까지 발을 떼지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선배의 이름을 알았다. 지새벽.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던 그 키 큰 뒷모습에 이름이 붙자, 세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교 정문을 나서 셋이 나란히 걸었을 때, 새벽 선배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툭 던지듯 말했다.
"내일부터도 여기서 기다려. 혼자 가다 또 울면 귀찮아지니까."
귀찮아지니까, 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듣는 내 가슴속에는 귀찮음과 정반대의 것이 뜨겁게 번져나갔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여 네, 라고 대답했다. 그날 저녁, 이불을 뒤집어쓴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지새벽'이라는 이름을 입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세 글자가 혀 위에서 굴러갈 때마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 후로 계절 하나가 흘렀다.
매일 여섯 시간째 수업이 끝나면 나는 신발장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두근거리며 먼저 도착해서 기다렸고, 며칠이 지나자 새벽 선배와 은하 선배가 먼저 와 있는 날도 생겼다. 그럴 때면 선배는 신발장 위에 팔꿈치를 턱 올린 채로 은하 선배와 뭔가 말하고 있다가, 내가 복도 끝에서 종종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하면 손을 한 번 들어 보였다. 특별한 인사도 아니고, 그냥 손바닥을 펴서 가볍게 올리는 정도. 그게 전부였는데, 그 작은 동작 하나가 내 하루의 방향을 결정했다. 나는 더 이상 쉬는 시간에 혼자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지 않았다. 대신 4층 계단참을 내려올 때 혹시라도 그 갈색 머리가 보일까, 자연스러운 척 복도를 걸었다. 물론 그 자연스러움이 남들 눈에도 자연스러웠는지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하굣길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새벽 선배가 앞에서 걸으면서 어제 본 TV 이야기나 축구 이야기를 은하 선배에게 하고, 은하 선배는 반 발짝 뒤에서 가끔 한마디씩 받아치거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둘보다 한 걸음 더 뒤에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간간이 선배가 뒤를 돌아보면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고, 그때마다 선배는 내 반응이 우스운 듯 코웃음을 쳤다.
비가 오던 6월의 어느 하굣길이었다. 우산을 안 가져온 나를 보고 새벽 선배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기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우산은 하나뿐이니까 은하 선배는 제 우산을 쓰고, 선배는 반쪽이 비에 젖으면서도 내 쪽을 향해 우산을 유지했다. '선배 어깨 젖어요'라고 겨우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시끄러. 다음엔 일기예보 좀 봐."
그 말이 차가울 수도 있었는데, 선배의 어깨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니 아무것도 차갑지 않았다. 좁은 우산 아래로 선배의 냄새가 섞여 들었다. 비누 향과 약간의 땀 냄새, 그리고 교복 셔츠에서 나는 빳빳한 섬유유연제 향. 심장이 미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니 은하가 제 우산 아래에서 살짝 웃고 있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7월이 되자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게 무엇인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돈할 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앞머리가 이마에 제대로 붙었는지, 교복 치마에 구김은 없는지. 그런 것들이 전에는 한 번도 중요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선배의 시야에 한 번이라도 들어갈 때 조금이라도 더 괜찮아 보이고 싶었다. 기말고사 기간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3학년 열람실 쪽을 슬쩍 살펴본 적도 있었다. 거기에 새벽 선배가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만약 있으면 어쩌지, 하는 그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 가슴 한가운데를 콕콕 찔렀다.
여름방학 직전 종업식 날, 셋이서 마지막 하교를 했다. 편의점에서 선배가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은하에게는 초코바, 나에게는 메론바. '맨날 메론맛 우유 마시길래'라는 짧은 이유를 듣는 순간, 나는 이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에 숨이 멎었다. 내가 매점에서 혼자 메론맛 우유를 집어 든 걸, 이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니. 그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나에게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가락으로 흐를 때까지 먹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선배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녹잖아. 빨리 먹어."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나는 오래오래 잠들지 못했다. 이 마음은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나를 작게 만들고, 동시에 아침마다 일어날 이유를 주는 것이었다. 열네 살의 나는 그것을 첫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줄 몰랐다. 다만 이 마음이 오래갈 것이라는 예감만은 확실했다. 선배가 졸업하고, 내가 졸업하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계단참에서 내려다보던 그 연한 눈동자와 '울지 말고 물어봐'라는 목소리를 잊을 수 없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 예감은, 10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틀린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