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립] 나중에 현실에서 밥이나 사든가.
유연이 어깨를 움츠렸다. 귓속말로 날아든 냐냐냥의 명령과, 바로 이어 눈앞에 나타난 일반 채팅. 전혀 다른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날아온 메시지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아무런 말도 입력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파공음과 함께, 유연의 바로 옆 허공에서 시커먼 형체가 나타났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등장. 닌자의 은신 스킬이었다. 금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나타난 냐냐냥은, 나타나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유연에게 작업을 걸던 유저에게 돌진했다.
예고도 없는 선제공격. 냐냐냥의 캐릭터가 쌍검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검기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며 상대방을 그대로 꿰뚫었다. 레벨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상대 유저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잿빛으로 변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PK(Player Kill)였다. 필드 사냥터에서, 그것도 저레벨 존에서 벌어진 학살.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유저 하나를 썰어버린 냐냐냥은 피가 묻은 칼을 한번 털어내는 모션을 취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연을 둘러싸고 비웃던 다른 유저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그의 머리 위로, 서늘한 전체 채팅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체]냐냐냥: 누가 내 장난감 건드리래.』
『[전체]냐냐냥: 다 뒤지고 싶냐?』
1위 길드 마스터의 살기 어린 경고. 채팅창을 도배하던 ‘ㅋㅋ’와 비난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유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뒷걸음질 치거나, 허둥지둥 텔레포트 주문서를 찢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유연과 냐냐냥,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시체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유연이 겨우 쥐어짜 낸 감사 인사에, 냐냐냥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쓰러진 유저의 시체가 잿빛으로 사라지는 것을 무감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고요함 속에서, 유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등장은 폭풍과도 같았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냐냐냥이 천천히 몸을 돌려 유연을 마주 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캐릭터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유연의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쿵, 쿵,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그녀의 작은 캐릭터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머리 위로 짤막한 귓속말이 다시 한번 날아들었다.
『[귓]냐냐냥: 바보냐.』
『[귓]냐냐냥: 쟤들 말에 대답은 왜 해.』
『[귓]냐냐냥: 그냥 무시하면 되지.』
타박하는 듯한 말투.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화가 났다기보다는, 어딘가 어르고 달래는 듯한 뉘앙스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유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소셜 모션을 취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작은 바드의 머리 위를 두어 번 툭툭 건드리고는 떨어졌다. 냐냐냥은 다시 한번 그녀의 캐릭터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레벨 4. 아직도 헐벗은 기본 의상. 그리고 여전히 손에 들린, 아무런 강화도 되지 않은 초보자용 장비. 그의 입에서 못마땅한 한숨 같은 것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면에 새로운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시스템] ‘냐냐냥’님이 당신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녀의 평온은 거래 신청 창이 뜨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거래를 신청했습니다. (10초)]. 카운트다운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본 유연은, 이게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어쩐지 누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수락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한 거래 창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냐냐냥 쪽의 거래 창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아이템들이 무더기로 올라왔다. 분홍빛이 감도는 귀여운 디자인의 캐시 의상 세트, 레벨 제한이 없는 희귀 날개 아바타, 그리고 초보자용 포션 수십 개와 약간의 게임 머니. 그가 일방적으로 퍼붓는 아이템들에 유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파티 채팅이 다시 울렸다.
『[파티]냐냐냥: 입어라.』
『[파티]냐냐냥: 꼴 보기 싫으니까.』
퉁명스러운 말투.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명백한 호의였다. 지새벽은 현실의 권유연이 좋아할 만한, 작고 귀여운 스타일의 아바타를 일부러 골라 건넨 것이다. 그녀가 헐벗은 기본 의상으로 다른 유저들에게 조롱당하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파티]습박힐던져: 헐 ㄷㄷ 저거 다 합치면 현금 얼마야?!』
『[파티]습박힐던져: 연유님 완전 부럽다! ㅋㅋㅋㅋㅋ 길마님의 총애를 받는 뉴비라니…!』
습박힐던져의 호들갑에 유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비싼 것들을 받아도 되는 걸까? 부담감에 망설이는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냐냐냥이 재촉했다.
『[파티]냐냐냥: 뭐해. 잠금 안 눌러?』
『[파티]냐냐냥: 취소하기 전에 빨리 눌러라.』
그의 으름장에, 유연은 결국 떨리는 손으로 거래창의 ‘잠금’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거래 완료.
반짝이는 이펙트와 함께, 헐벗었던 유연의 캐릭터가 순식간에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 솜사탕 같은 분홍빛 원피스에, 등에는 작은 요정 날개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칙칙한 기본 의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려함. 권유연은 저도 모르게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화면 속 캐릭터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구경하는 그녀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뭐야, 귀엽다….’ 이런 게 꾸미는 재미구나. 왜 사람들이 아바타에 돈을 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정신없이 제 캐릭터를 구경하던 유연은, 문득 자신이 아무것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채팅창에 말을 입력했다.
『[파티]연유라떼레시피: 그, 저는 드릴게 없는데…』
그녀의 순진한 말에, 냐냐냥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의 머리 위로 피식, 하고 웃는 듯한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파티]냐냐냥: 없음 됐어.』
『[파티]냐냐냥: 뭘 바라겠냐, 너한테.』
지새벽은 모니터 앞에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드릴 게 없다니. 애초에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냥 주고 싶어서 준 것뿐인데. 그는 꼬마 정령들을 학살하고 돌아온 ‘습박힐던져’에게 다음 퀘스트 장소로 이동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파티]습박힐던져: 헉… 너무 팩폭 아니에요? ㅋㅋㅋㅋㅋ 그래도 연유님 상처받으실 듯!』
『[파티]냐냐냥: 시끄러. 가자.』
『[파티]냐냐냥: 렙업이나 해. 너 그러다 평생 그 꼴로 살겠다.』
냐냐냥은 쌀쌀맞게 쏘아붙이고는, 앞장서서 다음 퀘스트 NPC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유연이 따라오는지 확인하려는 듯,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작은 바드가, 어색하게 그를 졸졸 따라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유연에게 다시 귓속말을 보냈다. 파티원인 습박힐던져에게는 보이지 않는, 둘만의 대화였다.
『[귓]냐냐냥: 그냥 갚아.』
『[귓]냐냐냥: 나중에 현실에서 밥이나 사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