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겨울이 몇 번이나 바뀐 뒤의 서울은 이상할 만큼 멀쩡했다. 출근 시간대 지하철은 늘 사람으로 가득했고, 편의점 유리문은 같은 소리로 열렸다 닫혔고, 블루페어리 공홈에는 또 무난한 이벤트 배너가 걸렸다. 바뀐 건 지새벽 쪽이었다. 처음 몇 주는 그냥 조용해진 정도라고 생각했다. 다투는 횟수가 늘고도 금방 풀지 못하던 날들이 겹쳤고, 같이 있어도 각자 폰만 보거나, 말끝이 자꾸 비껴 나가고, 예전엔 웃고 넘기던 작은 습관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더 쉬울 줄 알았는데 반대였다. 어디를 찌르면 아픈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돼버린 뒤에는, 사소한 말도 오래 남았다. 결국 끝을 말하던 날도 거창하지 않았다. 식은 커피 냄새가 남은 테이블, 해 질 무렵 창문에 걸린 탁한 주황빛, 그리고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귀에 박히던 냉장고 모터 소리. 지새벽은 그날의 마지막 얼굴을 한참 뒤에도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지만, 정작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이 먼저 나갔는지는 오래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버텨진다고 생각했다. 자존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속이는 데 익숙했다. 원래도 불편한 건 농담으로 넘기고, 불안을 시비로 덮고, 서운함은 더 퉁명스럽게 말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헤어진 직후에도 별일 아닌 척했다. 길드 공지 올리고, 공대 시간 맞추고, 방송 켜면 평소처럼 드립 치고, 게시판에서 괜히 냐냐냥 언급 나오면 비웃듯 넘겼다. 근데 사람 속은 UI처럼 숨겨지질 않았다. 새벽 두 시쯤 모니터 밝기만 방 안에 차갑게 번질 때, 손이 습관처럼 메신저 창 위를 맴돌았다. 집 안은 너무 조용했고, 키보드 스위치 소리조차 쓸데없이 크게 튀었다. 이제는 보내면 안 되는 문장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썼다가 지우는 동안, 공기엔 식은 먼지 냄새랑 늦은 밤 난방의 메마른 온기만 남았다. 연락하지 말자고, 적어도 한동안은 각자 숨 돌리자고, 그 말은 분명 둘이 같이 정한 건데도 먼저 깨고 싶은 쪽은 늘 지새벽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줄 알았다. 다들 그렇다고 했다. 근데 무뎌지는 대신 자꾸 더 선명해졌다. 대단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아주 하찮은 것들 때문에. 세탁기에서 꺼낸 수건에서 익숙한 바디워시 향과 비슷한 냄새가 잠깐 날 때, 마트에서 작고 단정한 머리끈 진열대를 지나칠 때, 카페 앞을 걷다가 유리창에 비친 제 옆자리가 괜히 허전해 보일 때. 게임에서도 그랬다. 길드창에 더는 올라오지 않는 닉네임 한 줄이 이상하게 크게 비었다. 바드가 파티에 들어오면 무의식적으로 스킬 이펙트를 먼저 봤고, 검은 머리 여캐가 지나가면 커서를 잠깐 멈췄다. 누가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손끝부터 어깨까지 체온이 스르르 빠지는 순간이 자주 왔다. 지새벽은 그럴 때마다 더 독하게 굴었다. 게임 시간을 늘리고, 레이드를 더 빡빡하게 돌리고, 잠 안 오면 아예 동 트기 전까지 깨어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틈에 한숨 쉬는 버릇이 생겼다. 빠삐코가 디코에서 한 번 툭 던진 적도 있었다. 예전엔 니가 시끄러워서 문제였는데 요즘은 조용해서 더 짜증 난다고. 그 말에 지새벽은 웃는 척했지만, 웃음 끝이 오래 못 갔다.
『[길드]직살: 길마 요즘 왜케 성질 덜 냄 무섭게』
『[길드]부먹파인애플피자: 저건 성질 덜 내는 게 아니고 기력 빠진 거임』
『[길드]빠삐코: 둘 다 맞음』
그 짧은 채팅 몇 줄이 이상하게 폐부를 찔렀다. 다들 대놓고 묻진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적어도 가까운 사람들은, 냐냐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지새벽은 그날 길드 던전을 끝내고 디스코드를 먼저 나왔다. 현관 불도 켜지 않은 집 안은 차갑고, 늦겨울 특유의 마른 냄새가 있었다. 소파에 대충 걸터앉아 폰 화면을 켰다가 껐다. 프로필 사진은 오래전에 바꿨는데도 손가락은 습관처럼 멈췄다. 그쯤부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심심함도 아니고 외로움만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었다. 같이 보낸 시간이 길어서 생긴 관성, 그 정도로 넘기기엔 너무 깊숙했다. 보고 싶었다. 그냥 얼굴 한 번 보는 걸로 끝나지 않을 만큼. 목소리의 속도, 말끝에 붙던 작은 망설임, 같이 있을 때 방 안 공기가 이상하게 안정되던 감각까지 몽땅 그리웠다. 그리고 더 늦게 알았다. 자기가 그리운 건 편한 사람이 아니라, 권유연이라는 사람 하나 자체라는 걸.
그걸 깨달은 뒤엔 후회가 뒤늦게 한꺼번에 몰려왔다. 싸우던 장면보다 싸우고 난 뒤의 태도가 더 선명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대충 넘긴 대화들, 괜찮냐고 제대로 묻지 않은 날들, 익숙하다는 핑계로 고맙고 미안한 말을 줄인 순간들.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제일 성의 없이 군 날이 분명 있었다. 지새벽은 원래 누가 자신을 얕보면 못 견뎌 했는데, 정작 가장 아끼던 사람의 다정함은 너무 당연하게 받아버렸다. 그 사실이 자존심보다 더 아팠다. 침대맡에 둔 휴대폰이 새벽마다 손에 잡혔다. 전화를 걸까, 문자라도 남길까, 아니면 그냥 한 번 찾아갈까. 머릿속에서 수십 번 시뮬레이션하던 끝에 늘 멈춘 이유는 하나였다. 혹시 이미 늦었으면 어떡하지. 혹시 자기 연락이 다시 불편함만 남기면. 그 겁이 지새벽다운 성질과 전혀 안 어울렸지만, 이상하게 그 문제 앞에서만은 계속 겁쟁이가 됐다.
『[잡담]라면먹는고블린: 냐냐냥 요즘 게임에서 예전처럼 안 깐죽댐 진짜 무슨 일 있나봄』
『[잡담]세탁망도둑: 연애하다 차인 것 같은데 ㅋㅋ』
『[잡담]익명A: 근데 ㄹㅇ 사람 하나 비워진 느낌 남』
결정적인 건 별것 아닌 하루였다. 봄비가 애매하게 내리던 저녁, 카페 알바 끝나고 나온 길에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올라오고, 횡단보도 신호음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그날은 유난히 피곤했고, 그냥 집 가서 씻고 쓰러지고 싶었다. 그런데 골목 모퉁이 빵집 쇼윈도 앞에서 발이 멈췄다. 예전에 같이 지나가다 괜히 웃었던 계절 한정 케이크 장식이 다시 걸려 있었다. 우스울 정도로 사소한 장면인데, 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같이 웃던 목소리는 없고, 유리창엔 혼자 선 제 모습만 비쳤다. 지새벽은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지 못했다.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차가운 금속 감각이 손바닥에 박혔다. 그제야 알았다. 더 미루면 평생 후회하겠구나. 잘될지 안 될지보다, 적어도 한 번은 제대로 사과하고 제대로 붙잡아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사랑 같은 건 자존심 세워서 이기는 게임이 아니었다.
며칠 뒤, 지새벽은 드물게도 오래 옷장을 열어둔 채 서 있었다. 괜히 과한 건 싫었고, 그렇다고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늘 입던 오버핏 재킷을 걸쳤다. 향이 과하지 않게 손목에만 한 번 얹었다.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습한 바깥 공기가 객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코트 자락과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 냄새가 뒤섞였고, 형광등 아래 사람들 얼굴은 하나같이 피곤하게 창백했다. 지새벽은 문 옆 손잡이를 잡은 채 몇 번이나 폰 화면을 켰다가 껐다. 대화창 목록은 조용했고, 엄지 끝은 익숙한 이름 앞에서 자꾸 멈췄다. 미리 뭐라고 보낼지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다가도 금방 엉켰다. 사과부터 할지, 보고 싶었다고 먼저 말할지, 그렇게 순서를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워서 입술만 한번 눌렀다. 창밖 터널 유리에 비친 제 얼굴은 생각보다 더 지쳐 보였고, 열차가 레일을 긁는 둔한 소리가 가슴 밑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역에서 나와 골목 쪽으로 접어들자 비는 거의 그쳤지만 공기는 아직 젖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물기 오른 보도블록에 길게 번졌고, 늦은 저녁 냄새가 희미하게 떠다녔다. 누군가 막 끓인 라면 국물 향이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나왔고, 멀리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뭉개져 들렸다. 지새벽은 익숙한 길 앞에서 오히려 발이 느려졌다. 몇 번이나 오갔던 곳인데도 이상하게 처음 오는 사람처럼 어깨가 굳었다. 손바닥엔 아직 지하철 손잡이의 차가운 감각이 남아 있었고, 심장은 꼭 계단을 뛰어오른 사람처럼 쓸데없이 빨랐다. 초인종 하나 누르는 일이 레이드 마지막 페이즈보다 어렵다는 사실이 기가 막혀서, 그는 낮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한번 들었다.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온 불빛은 따뜻했다. 그 빛을 보는 순간, 그동안 버틴 척했던 시간이 한꺼번에 얇아졌다. 혼자 밥 먹던 저녁들, 방송 끄고 나면 괜히 더 조용해지던 방, 아무 일 없는 척 웃다가도 집에 오면 텅 빈 것처럼 가라앉던 밤들이 불쑥 겹쳐졌다. 익숙함이 사랑을 닳게 만든 줄 알았는데, 뒤늦게 보니 닳아 있던 건 관계가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태도였다. 편해서 줄였던 말들, 알 거라고 넘겼던 눈치들, 괜찮겠지 하고 미뤘던 사과들이 지금 와서 전부 손끝에 걸렸다. 지새벽은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잠깐 움켜쥐었다 폈다. 손끝이 식어 있었고, 목 안쪽은 이상하게 말라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도 않았는데 길게 늘어졌다. 문 앞 복도등은 노랗고 조용했고, 어딘가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진동 소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자 지새벽은 준비했던 문장을 거의 다 잊었다. 대신 먼저 보인 건 익숙한 실내 불빛과 현관 매트, 그리고 너무 오래 못 본 얼굴 앞에서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제 호흡이었다. 그 짧은 정적이 더는 도망치지 말라고 등을 밀었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지새벽|나 왔다. 이렇게 오는 거 싫었으면 미안. 근데 문자로는 도저히 못 하겠더라. 나 진짜 할 말 있어서 왔어.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고, 끝이 조금 갈라졌다. 평소처럼 비뚤게 웃어넘길 틈도 없이 진심이 먼저 튀어나왔다. 골목에서 들어온 눅눅한 공기가 재킷에 밴 채로 현관 앞에 서 있는 모양이 스스로 봐도 썩 멀끔하진 않았다. 그래도 지새벽은 이번엔 말끝을 접지 않았다. 한 번 시작한 이상, 적어도 숨지는 않겠다는 표정이 눈가에 남았다. 복도 불빛이 창백한 뺨을 비스듬히 쓸고 지나갔고,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지새벽|헤어지고 나서 좀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 원래 다들 그렇다길래. 근데 나는 하나도 안 괜찮아지더라. 조용해지기만 했지. 집에 가도 이상하게 비어 있고, 게임 켜도 자꾸 허전하고, 뭘 해도 네 생각이 먼저 났어. 그게 그냥 습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네가 없으니까 알겠더라. 내가 얼마나 당연하게 굴었는지. 얼마나 네 다정함에 기대놓고 성의 없게 군 날이 많았는지. 그래서 왔어. 늦었어도 직접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을 꺼낼수록 오히려 어깨의 힘이 조금씩 빠졌다. 대신 부끄러움이 천천히 올라왔다. 자존심 때문에 삼켰던 문장들이 막상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더 맨얼굴 같았다. 골목에서 지나가는 차 바퀴 소리가 젖은 노면을 얇게 갈랐고, 현관 안쪽의 따뜻한 공기와 바깥의 서늘한 기운이 문턱에서 섞였다. 그 온도 차가 이상하게 선명해서, 지새벽은 문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무릎 아래로는 오래 서 있던 사람 특유의 뻐근함이 올라왔고, 손끝은 다시 조금 차가워졌다. 하지만 이번엔 그 차가운 감각이 도망갈 핑계가 되지는 못했다.
지새벽|나 후회 많이 했어. 싸운 거 자체보다, 싸운 다음에 내가 굴던 방식 때문에. 피곤하다는 이유로 대충 넘기고, 네가 말 안 하면 나도 모른 척하고, 가까우니까 괜찮겠지 싶어서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제일 못되게 굴었더라. 그거 인정하기 싫었는데, 인정 안 하면 진짜 끝날 것 같아서 왔어. 네가 지금 나 다시 보기 싫을 수도 있는 거 알아. 화났을 수도 있고, 이미 다 정리했을 수도 있고. 근데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더라. 나는 아직도 네가 너무 보고 싶고, 여전히 너 좋아해. 생각보다 훨씬 많이.
그 고백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대신 늦은 만큼 묵직했다. 장난기 없이 말하는 얼굴은 낯설 정도로 정직했고, 눈동자에는 일부러 꾸민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마디가 재킷 소매 안에서 한번 굳었다가 풀렸다. 지새벽은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동안 가장 무서워서 피하던 문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지새벽|한 번만 더 기회 주면 안 되냐. 예전처럼 대충 안 할게. 안다고 넘기지도 않을 거고, 괜찮겠지 하고 미루지도 않을게. 네가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듣고, 내가 미안하면 바로 말할 거야. 나 원래 이런 거 잘 못하는 거 알지. 근데 이번엔 못해도 할래. 너 놓치고 나니까 그제야 알겠더라. 내가 버틸 수 있는 척한 건 진짜 척이었어.
골목 끝에서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가 짧게 스치고 사라졌다. 복도등 아래의 공기는 고요했지만, 정적은 더 이상 차갑기만 하진 않았다. 문턱 가까이 선 지새벽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한 발자국도 더 들이밀지 않은 채 기다렸다. 조심스러운 건 원래 그의 방식이 아니었는데, 지금만큼은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진심처럼 보였다. 그러다 아주 잠깐, 입꼬리가 익숙하게 비틀렸다가 금방 풀렸다. 억지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는 습관이 뒤늦게 올라온 모양이었다.
지새벽|그리고… 나 진짜 한심하게 살았어 그동안. 네 없다고 텐션도 박살 나고 길드 애들한테 기력 빠졌단 소리 듣고. 빠삐코가 한숨만 쉬더라. 그러니까 내가 지금 좀 꼴사나워 보여도 봐줘. 원래 멀쩡한 척은 잘하는데, 오늘은 그거 안 하려고.
현관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생활 소음은 작고 따뜻했다. 어딘가에선 주전자 물이 끓는 듯한 미세한 떨림이 있고, 집 안 바닥의 온기는 문턱 아래까지 번져 나왔다. 그 앞에 선 지새벽은 여전히 굳은 듯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예전보다 더 솔직했다. 기다리는 동안 눈빛은 몇 번 흔들렸지만 피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거절이나, 차가운 침묵, 혹은 화가 섞인 원망 같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왔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온 것은 익숙한 온기와 젖은 목소리였다. 지새벽은 품으로 와락 파고드는 작은 몸을 미처 받아 안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섰다. 어깨에 얼굴을 묻는 움직임, 가디건 천 너머로 느껴지는 가느다란 떨림, 그리고 귓가에 울리는 젖은 숨소리가 한꺼번에 감각을 어지럽혔다. 늦은 밤 찬 공기에 식었던 몸 위로 뜨거운 온기가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그 온도 차이가 너무 선명해서, 그는 아주 잠깐 숨을 멈췄다.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이 망설이듯 허공에서 몇 번 맴돌았다. 이렇게 닿아도 되는 건가. 다시 밀어내면 어떡하지. 그런 바보 같은 걱정이 이 와중에도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어깨를 붙잡고 더 꽉 안아오는 힘에, 결국 버티던 마지막 이성마저 무너졌다. 지새벽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떨리는 등을 감쌌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온기가 거짓말처럼 생생했다. 그동안의 공백이 전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복도등 불빛은 여전히 노랗고, 바깥의 젖은 공기와 집 안의 따뜻한 기운이 그의 등 뒤에서 부딪혔다.
지새벽|……울었어?
겨우 뱉어낸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잠겨 있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던 심장 소리가 너무 가까워서, 이게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후회와 안도, 그리고 아직 가시지 않은 미안함이 뒤섞여 목구멍을 뜨겁게 막았다. 괜찮을 줄 알았다는 오만, 혼자서도 버틸 수 있을 거라던 착각이 부서진 자리에는 엉망인 진심만 남아 있었다.
지새벽|미안해. 더 일찍 못 와서 미안해. 이렇게 울게 만들어서 미안해. 전부 다.
두서없이 튀어나온 사과는 고백보다 더 솔직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익숙한 샴푸 향과 그녀의 체취가 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하찮고 사소한 감각이, 지난 몇 달간 그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혼자 남은 집 안에서 몇 번이나 이 향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지새벽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서툴고,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지새벽|나 진짜… 너 없는 동안 계속 후회했어.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굴었는지, 네가 옆에 없을 때가 돼서야 알았어. 다 알면서도, 안다고 생각해서 더 함부로 군 거. 그거 진짜 못난 짓이었는데.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인정하기도 싫었나 봐. 한심하지, 진짜.
자조적인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붉어진 눈가와 젖은 뺨이 복도등 아래에서 더 선명하게 보였다. 엄지손가락으로 눈 밑을 조심스럽게 훔쳐주자, 손끝에 미지근한 물기가 묻어났다. 그 감촉에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그는 문이 열린 채로 복도에 서 있는 이 상황이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여기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지새벽|일단 들어가자.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응?
그는 거의 애원하듯 속삭이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로 이끌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음과 차가운 공기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익숙한 집 안의 공기, 신발장에 놓인 단정한 신발들,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잡동사니들. 모든 것이 변함없는데, 그 안에 자신이 다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등을 기댄 문에서 한참 떨어지지 못했다. 여전히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 온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