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유연에게
이걸 편지라고 부르면 좀 웃기지. 줄도 안 맞고, 문장도 들쭉날쭉할 거고, 무엇보다 너한테 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래도 굳이 첫 줄에 네 이름부터 쓴 건, 그게 아니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부터 헷갈릴 것 같아서야. 요즘은 이상하게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게임 켜면 레이드 타이머보다 네 접속 표시를 먼저 보고, 폰을 내려놔도 네가 보낸 메시지 알림이 안 왔나 다시 화면을 켠다. 웃기지. 남들이 보면 랭커 길마가 뭐 이런 걸로 정신이 팔리냐고 할 텐데, 나도 알아. 근데 안다고 해서 덜 그러는 건 아니더라.
나는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안다. 확신하게 된 건 꽤 됐고, 그전부터 느낌은 있었어. 오래 본 사람이면 알 수 있는 그런 거 있잖아. 말투가 아주 조금 달라지는 거,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때보다 나랑 단둘이 있으면 숨소리가 먼저 조용해지는 거, 별일 아닌데도 내 기분을 제일 먼저 살피는 눈. 네가 숨기려고 할수록 더 티 났어. 그걸 눈치챈 날, 솔직히 처음에는 머리가 멍했다. 너라서 놀랐고, 나한테 그런 마음을 그렇게 오래 품고 있었단 사실이 더 놀라웠고. 그리고 그다음엔, 진짜 비겁한 생각부터 들더라. 아, 큰일 났네. 이제 내가 어떡하지. 내가 모른 척하면 너는 얼마나 더 아플까. 내가 아는 티를 내면 너는 도망갈까. 그런 식으로.
웃긴 건, 그 무렵부터 내가 제일 못된 방식으로 너를 더 의식했다는 거다. 괜히 시비 걸고, 쓸데없는 말 던지고, 남들 앞에서는 더 얄밉게 굴었지. 네가 나한테 마음 있는 걸 알아버렸는데, 정작 나는 내 마음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거야. 아니, 싫었다기보다 무서웠어. 너는 나를 오래 좋아했겠지만, 나는 그 사실을 안 뒤부터 더 엉망이 됐거든. 네가 나 좋아하는 걸 알면 보통은 선을 긋든가, 아니면 받아주든가, 둘 중 하나를 해야 맞는 거잖아. 그런데 나는 그 중간에서 제일 추하게 굴었어. 선을 긋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당장 손을 내밀지도 못했다. 괜히 장난처럼 흘리고, 농담처럼 감추고, 내가 덜 진심인 사람처럼 굴었어. 사실은 그 반대였는데.
네가 나를 볼 때마다 조심스러운 이유를 이제는 알아. 상처받기 싫어서가 아니라, 상처받아도 내가 불편해할까 봐 더 먼저 물러나는 거. 그게 너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까지 착해. 왜 맨날 네 마음은 뒤로 미뤄. 왜 나 같은 놈 앞에서도 너는 끝까지 배려부터 하냐고. 너는 항상 내가 편한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 있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자꾸 네 쪽으로 오게 만들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또 네가 먼저 멈춰주길 바랐다고. 진짜 치사하지. 나도 안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어. 게임에서 네 닉네임이 길드창에 들어와 있을 때, 그냥 그 한 줄 때문에 방 안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은 순간. 디스코드 알림음이 짧게 울리고, 혹시 네 메시지인가 싶어 손이 먼저 가는 순간. 남들은 별생각 없이 넘길 걸 나는 괜히 붙잡고 오래 봐. 네가 오늘 하루 어땠는지, 밥은 제대로 먹었는지, 실습은 안 힘들었는지, 누가 또 네 탓도 아닌 일로 미안하다는 말 하게 만들진 않았는지. 그런 생각들이 줄줄이 따라왔어. 이상하게도 그건 한 번 시작되면 잘 안 멈추더라. 꼭 창 여러 개 띄워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시끄러워져. 그런데 그 소란이 싫지 않아. 오히려 네가 조용한 날이 더 불안해. 네가 잠깐 말이 없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답장이 늦으면 괜히 휴대폰만 뒤집었다 엎었다 하고. 자존심 상하게.
너는 아마 아직 모르겠지. 내가 왜 네가 다른 사람이랑 가까워 보이면 괜히 말끝이 날카로워지는지. 왜 길드에서 누가 너한테 과하게 친한 척하면 내가 먼저 한마디 얹는지. 왜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풀이 죽어 있으면 내가 더 예민해지는지. 그거 다 설명할 길이 없다. 설명하는 순간 너무 많이 들킬 것 같아서. 나는 네가 나 좋아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네가 혹시 이젠 포기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을 해. 말이 되냐 이게. 내가 손도 안 잡아놓고, 먼저 확실히 한 것도 없으면서, 네 마음이 줄어들까 봐 불안해한다는 게. 그런데 진짜 그래. 네가 내 쪽을 보지 않는 하루가 오면, 나는 그날 아주 형편없을 것 같다.
나는 네가 특별한 척하는 사람보다, 네가 원래 가진 다정함 그대로 있는 모습이 좋아. 괜히 애쓰면서 밝게 굴 때보다, 피곤해서 조금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모습이 더 오래 남는다고. 작은 손으로 컵 만지작거리는 것, 무릎 위에 손 가지런히 올려두는 것, 무슨 말을 할지 잠깐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는 목소리. 그런 게 자꾸 쌓였어. 눈에 밟히고, 기억에 남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이상하게 선명해져. 향도 그래. 진한 향수 냄새 하나 없는데, 네 옆에 있다가 혼자 돌아오면 옷깃에 남은 포근한 향이 한참 가더라. 그게 별것도 아닌데, 괜히 사람 미치게 만들어.
네가 나 좋아하는 걸 처음 분명하게 알아챈 날 이후로, 사실 나는 예전으로 못 돌아가. 너를 그냥 오래 본 동생처럼 대하는 척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거든. 네가 웃으면 따라 웃게 되고, 네가 위축되면 그 자리 공기부터 거슬리고, 네가 나 때문에 울까 봐 그건 또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도 정작 너 앞에만 서면 쉬운 말을 못 한다. 내가 평소에 입만 살았지, 진짜 중요한 순간엔 제일 형편없는 거 알지. 남들 앞에서는 드립도 잘 치고 시비도 잘 거는데, 너한테는 정작 한마디가 막혀. 장난처럼 말하면 네 진심을 가볍게 다루는 것 같고, 진지하게 말하려니 내가 먼저 무너질 것 같아서.
솔직히, 네가 나 좋아한다고 알아버린 뒤부터 더 많이 참았다. 조금만 틈 보이면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가 고개 숙이고 웃을 때마다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손끝 한 번 스치면 별일 아닌 척하면서도 밤에 그 감각이 남아 있어서. 이런 말 쓰는 것도 민망한데, 사실이 그래. 다만 나는 네가 그런 마음으로 나를 오래 좋아했다는 걸 아니까 더 함부로 못 했다. 내가 진짜 확신도 없이 다가가면 너는 분명 받아줄 것 같았거든. 그게 더 무서웠어. 네가 나를 좋아하니까 받아주는 거 말고, 내가 좋아서 받아주는 거여야 하잖아. 적어도 나는 그러고 싶었거든. 그래서 자꾸 확인하고 싶었고, 그래서 더 늦어졌고, 그 사이에 네 마음은 얼마나 닳았을까 생각하면 목이 막힌다.
아마 너는 내가 눈치 못 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내가 워낙 장난스럽게 굴었으니까. 일부러 그랬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날이 많았어. 미안하다, 진짜. 네가 얼마나 용기 냈는지 아니까 더 미안하다. 오래 좋아한 마음은 꺼내는 순간 끝장날 각오도 같이 해야 하잖아. 그런데 나는 그 앞에서 너무 오래 비겁했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아는 척할 수 있었고, 내가 먼저 손 내밀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못 했어. 혹시 내가 착각한 거면 어쩌지 하는 핑계도 있었지만, 사실 제일 큰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네가 너무 소중해진 상태였고, 그런 상대에게는 오히려 쉽게 못 덤비겠더라. 잃는 상상이 먼저 드는 거다.
이상하지. 남들한테는 별로 안 하던 생각을 너한테는 해. 네가 나랑 있으면 덜 불안했으면 좋겠고, 네가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네가 무슨 일 생기면 제일 먼저 나를 찾았으면 좋겠어.
만약 이때의 내가 너한테 솔직해질 수 있었다면, 아마 이런 말은 했을 것 같아.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내가 너를 대충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부터 제대로 인정할 시간만 조금 달라고. 너 좋아하는 티 내는 주제에 끝까지 장난처럼 구는 날이 있어도, 그게 마음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오히려 반대라고. 네 앞에서는 이상하게 자존심도 헛돌고 말도 꼬여서, 덜 좋아하는 척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니까 네가 혹시 지쳐도, 네 마음이 너무 오래 혼자였다고 느껴도, 전부 네 착각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보다 훨씬 전부터 너한테 기울어 있었고, 그걸 인정하기 시작한 뒤로는 예전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어.
너는 내가 함부로 다뤄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더 늦었어. 그런데 웃기게도, 그렇게 조심한 끝에 제일 먼저 망가진 건 나였네. 네가 웃으면 따라 웃고, 네가 힘없으면 이유도 없이 신경이 곤두서고, 네가 나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상상 하나로 밤이 길어지는 쪽. 그게 나였어. 그러니까 언젠가 내가 진짜로 말하게 되면, 그땐 장난처럼 안 할 거야. 도망갈 틈도 없이 진심이라고 말할 거고, 네가 그동안 혼자 견딘 시간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앞으로는 덜 외롭게 만들 거야. 그 말은, 아마 꼭 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