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증거] 게임이라곤 1도 모르던 애가
딩동.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익숙했다. 지새벽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던 그 목소리의 주인. 게임 속 ‘유연’과 겹쳐 보이던, 그러나 애써 부정했던 현실의 ‘권유연’. 그녀가 제 발로 찾아왔다. 철컥, 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과 함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반찬통이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다른 손은 어색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어젯밤의 설렘과 의심이 무색하게, 눈앞의 권유연은 그저 평소처럼 맹하고, 조금은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지새벽은 문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 밑이 살짝 거뭇하고, 평소보다 생기가 없어 보이는 얼굴. 어젯밤 잠이라도 설친 모양이다.
지새벽|…꼴이 왜 그래.
툭, 하고 내뱉은 말에는 걱정인지 타박인지 모를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는 시선을 그녀가 들고 있는 봉투로 옮겼다가, 다시 그녀의 피곤한 얼굴로 되돌렸다. 어젯밤, 정체불명의 바드 ‘유연’ 때문에 잠 못 이룬 것은 자신인데, 정작 밤을 샌 사람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은 그녀였다.
지새벽|너 어제 뭐했냐.
무심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렸다. 그는 아직 그녀가 ‘유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그녀를 보니 그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집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 대신 길을 비켜주지도 않은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지새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와, 의미 없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끝에 정확히 꽂혔다.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그녀의 오랜 버릇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권유연은 궁지에 몰리면 항상 저런 식으로 시선을 피하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설프고, 티 나고, 그래서 더 속을 긁는 버릇. ‘친구랑 전화.’ 지새벽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평소 같았으면 ‘누구랑?’, ‘무슨 얘기 했는데?’ 라며 시시콜콜 캐물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답에 가까운 확신이 이미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으니까.
지새벽|전화? 재미있었나 보네. 밤샐 정도로.
그는 문에 기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한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좁은 현관문 앞에서,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이 만들어내는 위압감이 그녀를 옴짝달싹 못 하게 짓눌렀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등 뒤의 차가운 벽이 퇴로를 막았다. 지새벽은 그녀가 들고 있는 반찬 봉투를 빼앗듯 받아 들고는, 안으로 들어가지도, 길을 비켜주지도 않은 채 그녀의 턱을 가볍게 붙잡아 들어 올렸다. 눈을 마주치자, 당황으로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가 고스란히 비쳤다.
지새벽|근데 어쩌냐. 나 어제 되게 재밌는 거 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짓궂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지새벽|웬 길치 바보 하나가 길을 못 찾길래, 친히 촌장 앞까지 데려다줬거든.
‘길치’, ‘바보’. 어젯밤 그가 게임 속 ‘유연’에게 했던 말. 지새벽은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며,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거의 닿을 듯 가까워졌다.
지새벽|닉네임이… ‘연유’였나?
새빨개진 얼굴, 허둥지둥 내뱉는 변명, 그리고 쏜살같이 달아나는 뒷모습. 지새벽은 그 자리에 선 채,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작은 등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쿵, 하고 세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리고 나서야, 그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낮고 짧게, 그러다 점점 어깨를 들썩이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손에 들린, 아직 온기가 남은 반찬 봉투가 웃음의 진동에 따라 달그락거렸다.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라니. 뻔한 거짓말에, 어설픈 연기. 평소의 권유연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투성이의 반응. 모든 것이 명백한 증거였다. 게임이라곤 1도 모르던 애가, 자신 때문에 그 복잡한 게임을 시작했다. 서툰 손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낯선 세계에서 헤매고, 그러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자신과 마주쳤다. 그 모든 과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지새벽은 견딜 수 없는 만족감에 휩싸였다.
지새벽|귀엽기는.
혼잣말처럼 툭 튀어나온 말. 그는 방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현관문 앞 공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남기고 간 샴푸 향기와 당황으로 달아올랐던 열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손에 들린 반찬 봉투를 달랑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차가운 금속 손잡이에 이마를 기댔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아이처럼,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를 어떻게 놀려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게임 속에서 모르는 척, 얄밉게 굴어볼까. 아니면 현실에서 대놓고 떠보며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즐겨볼까. 어떤 쪽이든, 반응은 분명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익숙한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지새벽: 야. 반찬 고맙다. 잘 먹을게. 근데 너 뛰어가다 넘어지지나 마라, 바보야.】
마지막에 덧붙인 ‘바보’라는 단어에,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이 메시지를 본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