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뽑기 전쟁
날씨가 미쳤다. 영하 8도. 그런데도 번화가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지새벽은 유연의 손을 자기 패딩 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걷고 있었다. 유연의 손이 얼음장이라 녹여주는 중이었는데, 본인 손도 차가워서 실질적 효과는 미지수였다. 유연이 걸음을 멈췄다. 지새벽도 덩달아 멈췄다. 유연의 시선을 따라갔다. 골목 한편에 낡은 인형뽑기 기계가 놓여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초록색 외관. 동전 투입구가 녹슬어 있었고, 유리 안쪽에는 온갖 인형들이 뒤엉켜 쌓여 있었다. 토끼, 곰, 강아지, 고양이.
그 사이에.
흑발 긴 생머리에 노란 눈을 가진, 작고 동글한 인형이 한 개 끼어 있었다.
사이즈는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볼에 분홍빛 홍조가 찍혀 있었다. 큰 눈에 노란 단추 눈알. 흑발 실크 머리카락이 등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기계 안을 들여다봤다.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옆의 유연을 봤다. 다시 인형을 봤다. 유연. 인형. 유연. 인형.
지새벽│......
지새벽│야, 이거 너 아니냐.
벽안이 번뜩였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
지새벽│잠깐만. 한 판만.
주머니에서 유연의 손을 빼내고, 대신 지갑을 꺼냈다. 천원짜리 한 장을 동전 교환기에 밀어넣었다. 500원짜리 두 개가 떨어졌다. 한 판에 500원. 첫 번째 동전을 넣었다.
1회차: 500원
조이스틱을 잡은 지새벽의 손이 자신감에 차 있었다. 패션디자인과 4학년의 섬세한 손가락. 크레인이 움직였다. 왼쪽. 앞으로. 정지. 내려간다. 크레인 집게가 인형의 머리 위를 스쳤다. 집게가 빈 공기를 움켜쥐고 올라왔다.
지새벽│......
지새벽의 눈꼬리가 실룩거렸다.
지새벽│워밍업이야.
2회차: 1,000원
두 번째 동전. 이번엔 좀 더 신중하게. 크레인을 인형 바로 위에 정확히 위치시켰다. 내려간다. 집게가 인형의 몸통을 잡았다. 올라간다. 인형이 3센티미터 떠올랐다. 미끄러졌다. 퉁. 제자리.
지새벽│......아.
턱에 힘이 들어갔다.
3회차~5회차: 2,500원
지갑에서 천원짜리를 연달아 꺼냈다. 동전 교환. 500원짜리가 쏟아졌다.
3회차: 집게가 옆의 토끼 인형을 건드리며 목표물이 밀려남.
4회차: 인형의 머리카락만 살짝 물고 올라옴. 0.5초 후 낙하.
5회차: 집게가 인형을 확실히 잡았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이동한다. 배출구 위까지 왔다. 떨어졌다. 배출구 옆으로.
지새벽│아 시발.
이마에 핏줄이 섰다.
6회차~10회차: 5,000원
지새벽의 자세가 바뀌었다. 패딩 지퍼를 내리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기계 앞에 다리를 벌리고 서서 조이스틱을 두 손으로 잡았다. 마치 게임 레이드 보스전에 임하는 자세.
6회차: 실패.
7회차: 실패.
8회차: 인형이 1센티미터 이동. 희망 발견. 9회차를 위한 포석이라 자위.
9회차: 인형이 도로 원위치. 포석 따위 없었음.
10회차: 집게가 인형의 팔을 물었다가 놓침. 인형이 뒤집어짐.
지새벽│야 이거 사기 아니냐. 집게 세기가 개 약한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기계는 차갑게 'INSERT COIN'을 표시했다.
11회차~15회차: 7,500원
지새벽의 눈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벽안에 핏줄이 서서 벽안이 아니라 혈안이 되어가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만원짜리를 꺼냈다. 동전 교환. 500원짜리가 우수수 쏟아졌다.
11회차: 인형 근처에도 못 감.
12회차: 집게가 내려가는 도중 흔들림. 기계 자체가 기울어진 것 같다고 의심.
13회차: 인형을 잡았다. 올렸다. 3초간 공중에 떠 있었다. 희망의 3초. 그리고 추락.
14회차: 인형이 다른 인형 밑에 깔림. 상황 악화.
15회차: 깔린 인형을 꺼내려고 위의 토끼를 밀어냄. 토끼가 배출구로 떨어짐.
토끼 인형이 나왔다. 원하지 않은 토끼가.
지새벽│......토끼 뽑으러 온 거 아닌데.
토끼 인형을 집어들고 멍하니 바라봤다. 1초. 유연에게 던져주듯 건넸다.
지새벽│이건 서비스고. 아직 안 끝났어.
16회차~20회차: 10,000원
누적 금액이 만원을 넘었다. 인형 하나 사는 게 더 쌀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새벽은 멈추지 않았다. 왜? 포기라는 단어가 이 남자의 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새벽이라는 인간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종류였다. 게임에서든 현실에서든. 레이드 보스를 잡을 때도 그랬다. 전멸해도, 전멸해도, 전멸해도 다시 들어갔다. '이거 왜 못 깸?'이라는 의문이 '반드시 깬다'로 바뀌는 데 0.5초면 충분한 남자. 인형뽑기 기계 따위에 질 수 없었다.
21회차~25회차: 12,500원
지새벽의 지갑에서 만원짜리가 또 나왔다. 세 번째 만원이었다. 이쯤 되자 옆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슬슬 구경하기 시작했다. 188센티미터의 남자가 낡은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광경. 레더 자켓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12월 영하 8도에 땀을.
21회차: 집게가 인형의 원피스를 물었다. 1센티미터 끌려왔다. 진전.
22회차: 2센티미터 더. 배출구 방향으로.
23회차: 인형이 다른 인형 위에 걸림. 후퇴.
24회차: 걸린 인형을 밀어내려다 목표물까지 같이 밀려남. 원점 회귀.
25회차: 지새벽이 기계를 한 대 쳤다.
지새벽│이 개같은.
기계가 흔들렸다. 안의 인형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유연을 닮은 인형이 다른 인형 더미 위로 올라왔다. 결과적으로 위치가 좋아졌다.
26회차: 13,000원
마지막 500원을 넣었다.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었다. 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조이스틱을 움직였다. 천천히. 밀리미터 단위로. 크레인이 인형 바로 위에 멈췄다. 내려간다. 집게가 인형의 몸통 정중앙을 잡았다. 단단히. 올라간다. 인형이 떠올랐다. 5센티미터. 10센티미터. 이동한다. 배출구 위로. 3초. 2초. 1초. 뚝. 인형이 배출구 안으로 떨어졌다.
통.
지새벽이 멈췄다. 1초간 기계를 바라봤다. 배출구의 뚜껑을 밀어 올렸다. 손을 넣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손가락에 닿았다. 흑발 긴 생머리. 노란 단추 눈. 하얀 원피스. 볼에 분홍빛 홍조. 유연을 닮은 인형이 지새벽의 손 안에 있었다.
지새벽│......
지새벽은 인형을 들어올려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인형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유연을 봤다. 인형. 유연. 인형. 유연. 입꼬리가 올라갔다. 승리자의 미소. 오만하고 찬란한.
지새벽│26판.
인형을 유연의 코앞에 내밀었다.
지새벽│만삼천원어치 사랑이야. 받아.
13,000원. 인터넷으로 사면 3,900원짜리 인형이었다. 지새벽은 그 사실을 절대 검색하지 않을 것이다.